즐겨찾기+ 최종편집:2019-11-19 오후 07:46:55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전체기사
커뮤니티
공지사항
 
뉴스 > 문화
■ 가짜뉴스로 주인 뒤바뀔 뻔한 '300년된 발물레' Ⅱ 언론서 왜곡한 '문경 9대 도예가문의 진실은…'
김영식씨 "부친이 도자기술 전수" 주장
가족 "김정옥 사기장에 배운 것" 증언
김영식씨'가족사랑·평화 중시'인터뷰
동생 "형제들과 담쌓고 사는데…" 반박
노병수'발물레 조선요에 있어야'보도
노 선생 "그렇게 말한적 없어" 화들짝
A주간신문사의 가짜뉴스로 확인 충격
김정옥 선생 자녀 김남희 소장
"큰 아버지(김천만) 발물레 사용 안해"
A주간신문사와 인터뷰서 밝혔지만
"허위 사실 기재에… 매우 유감" 씁쓸
경상투데이 기자 / lsh9700@naver.com입력 : 2019년 10월 22일(화) 19:20


↑↑ 1- 샘이깊은물에 실린 김정옥 사기장 물레작업사진(관음리 작업장-1987년).
ⓒ 경상투데이
↑↑ 2- 샘이깊은물에 실린 김정옥 사기장 물레작업사진(관음리 작업장-1987년).
ⓒ 경상투데이
 문경 9대 도예가문의 진실을 밝힌다.

 일부 언론사들의 확인되지 않은 내용에 대한 무분별한 기사에 대해 당사자들의 심각한 명예훼손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경북도무형문화재 김영식씨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다룬 일방적인 기사에 대해 비난이 일고 있다.

 문화재청 공식홈페이지에는 조선요 김영식씨의 도 무형문화재지정 배경에 대해 '김영식은 어린 시절부터 흙 굽는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웠으며, 중·고교 시절에는 부친의 가마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도공의 길을 선택한 계기는 1989년 부친이 작고한 후로 이때부터 가업을 계승하기 위해 숙부인 김정옥(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의 요장 즉 망댕이 사기요를 왕래하면서 기술을 습득했다. 숙부로부터 도예기술을 익힌 후 1991년 '조선요'를 열어 도예의 맥을 이어왔다'고 기술돼 있다.

 본지 취재 결과 김영식의 부친 김천만씨는 도자제작 기술이 없었으나 장남으로서 대부분의 농토(일부는 김천만씨의 첫째 동생 복만씨가 물려받음)와 망댕이 가마 그리고 작업장의 터를 물려받았으며 이를 김천만씨의 장남 김영식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는 본지 기자가 김정옥 사기장의 누님 두 분과 조카들의 증언, 문산 김영식씨의 동생 김용식(서울·48)씨의 증언에서 확인했다.

 또 모 언론에서 기술한 김정옥 선생의 65년도 의정부 상경과 다시 관음리로 돌아오게 된 배경(김천만씨가 의정부서 직장생활이 어려워 생활고를 겪는 동생 김정옥을 71년 관음리로 데려와 사기장을 같이 운영했다는 내용)은 잘못된 정보다.

 김정옥 선생은 60년대 후반부터 도자기 주문이 줄고 작업을 잇기 어려운 상황에서 생계를 위해 1969년 겨울 경기도 의정부로 상경했다.

 선생의 독자 김경식씨는 1968년 5월생으로 문경 관음리가 출생지로 선생이 관음리 가마작업장 바로 아래에서 큰 형님(김천만) 가족과 함께 아버지 김교수 사기장을 모시고 살 때 태어났다.

↑↑ 관음리 망댕이 사기요 작업장의 발물레.
ⓒ 경상투데이
 김정옥 선생은 상경 1년 후인 1970년에 서울 소공동 반도아케이드 도자기 전시장에서 고미술상(장원진, 1943년생)을 만나 이들 부자의 요청으로 관음리 작업장으로 돌아왔으며 미술상으로부터 도자기 주문을 대량으로 받고 작업을 이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가족을 부양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71년에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을 문경으로 데려온 것으로 확인됐다.

 1968년부터 관음리 가마에서 김정옥 사기장을 연구했던 정명호 교수는 1995년 '실학사상연구' 5권(모악실학회)에 실린 '沙器匠 名稱과 제조기술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조선시대 마지막 도공인 김교수는 1894년에 태어나 73년에 79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79년간에 걸쳐 한때는 나라 잃은 슬픔과 광복 후 골육상쟁의 한국동란이라는 아픔을 겪는 동안 광명을 얻지 못하고 겨우 막내아들 김정옥에게 그의 기량과 기술을 전수시키고 돌아가시고 말았다'고 기술했다.

 정명호 교수의 논문(1995) 47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실려있다.

 '김정옥씨는 그의 부친이 타계하신 후에도 백씨(김천만 선생)와 함께 가업인 막사기점을 계승했다. 즉 명성높은 부친이신 김교수옹이 타계한 후에는 그나마 부친을 찾아왔던 일본인은 물론 국내 고객마저 찾아오는 일이 끊겨 사기점을 유지할 길이 막연했다. 손님도 없을 뿐 아니라 만든 사기그릇을 소비할 길도 없었다. 결국 유산으로 물려받은 적은 농사로는 두 집 살림을 유지하기에 역부족이었으므로 도저히 백씨나 김정옥씨 어느 한쪽이 부족된 농사에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리해 마침내 김정옥씨는 관음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됐다. 형님은 한집 살림을 꾸릴 만한 농토를 갖고 있어 그런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나 배운 것이라곤 사기그릇을 짓는 기술밖에 없던 김정옥씨는 생계가 막연해 이곳을 떠나 남의 집 직공으로 들어가든가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절박한 사정에 놓이게 됐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때 학업을 중단하고 17세 부터 6대 선친 김교수 사기장의 가업을 계승해 온 백산 김정옥 사기장은 1982년까지 25년 동안 관음리 가마에서 작업을 이어오며 자신이 만든 그릇들을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다 82년도에 문경읍 진안리에 터전을 마련하고 영남요를 개요했으며 이때 김교수 사기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발물레도 함께 가져와 가업을 이어갔다.

↑↑ 김정옥 사기장이 70년대에 만든 분청사기항아리, 조선요 박물관 전시실.
ⓒ 경상투데이
 조선요 김영식의 선친 김천만 선생은 6대 김교수 사기장이 작고한 후인 74년경에 신정희(당시 고미술상으로 조령요 운영)씨가 김정옥 사기장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아 작업하고 있었던 전통발물레를 팔라고 하자 김천만 선생은"10만원을 주면 팔겠다"고 했으나 김정옥 사기장이 "그 발물레는 선조들이 대대로 사용하며 우리 사기장 집안을 먹여살려온 중요한 도구"라며 극구 반대해 거래가 성사될 수 없었다고 한다.

 김정옥씨는 영남요 개요 후에도 3년간이나 도자제작 기술이 없었던 형님 김천만씨의 부름에 따라 영남요에서 관음리 작업장을 오가며 도자작업을 해드렸고 그 당시 점촌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던 조카에게 부탁해 만든 발물레로 관음리에서도 그릇 만드는 일을 도맡아 해 왔다고 한다.

 지금 관음리 '망댕이 사기요' 작업장에 있는 조선요 김영식이 '이미테이션'이라고 표현한 발물레가 그때 당시 김정옥 선생이 조카에게 부탁해 만들어 관음리 작업장에서 사용하던 발물레다.

 1987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김정옥 선생이 출품한 '백자 사발대접'을 보고 한국문화재계의 거장 네명(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 발행인 故 한창기선생, 故 예용해 문화재위원, 정양모 국립박물관장, 정명호 교수) 이 김정옥 선생을 만나기 위해 문경에 왔었다.

 당시 한창기 선생은 '샘이 깊은 물'에 김정옥 사기장에 대해 8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남겼는데 '참으로 감격스러운 구경을 하고 왔어요… 깜짝 놀랐다…'(중략) '맏형 천만씨는 흙손은 씻은 셈이지만 그 가마옆에 아직 눌러 살고 있고, 작은 형은 딴 마을에 살고 있고, 막내 아우 정옥씨가 문경읍내에 영남요를 따로 차리고 제금나 있는 셈이기는 하지만 관음의 사기점을 왔다갔다 하면서 짐자컨대 칠·팔대째의 가업을 잇고 있다'고 김정옥을 소개하고 있다.

 1973년부터 현지에서 조사한 다각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86년에 발간된 '문경대관(聞慶大觀)'의 '문경도자사 개요'와 '문경지방 도자수공업 효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843년 관음리에 김교수 공방이 창업됐으며…(중략)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백자를 만들었고 그 기법은 최근까지 명맥을 유지하면서 오늘날에는 김정옥에게 전수됐다'.

 이처럼 1968년 부터 김정옥 사기장을 관찰했던 정명호 교수의 논문과 1973년부터 문경도요지 조사 자료를 집대성한 문경대관 그리고 1987년 한창기 선생의 글 등 여러 문헌자료에서 김정옥 선생이 김교수 사기장의 맥을 계승하며 관음리 가마를 운영하고 있으며 가마의 주인으로 묘사돼 있다.

 문화재청에서 소개하고 있듯 1989년 김천만씨가 59세의 나이로 별세한 후 김정옥 사기장은 어려서부터 관음리 작업장에서 허드렛일을 돕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조카 김영식에게 본격적으로 도자 만드는 기법을 전수했다. 이후 김정옥 선생은 96년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조카 김영식을 전수장학생으로 선정하고 2002년에는 이수자로 지정해줬다.

 현재 김영식 사기장이 사용하고 있는 '조선요' 가마의 이름도 김정옥 사기장이 직접 지어준 것이다.

 조선요 김영식은 집안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가마와 작업장 터를 그대로 물려받아 관음리 망댕이 가마의 소유자로 등록됐다.

 김영식씨의 첫째 동생 용식(서울, 48세)씨는"아버지는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으셨다. 도예가 7대 김천만이라 지칭하는 것은 맞지 않고 형님 김영식은 김정옥 숙부님께 도자기술을 전수 받았다"고 말했다.

 모 언론에서 김영식씨가 "숙부가 조선요의 전통 발 물레를 빌려가 돌려주지 않고 있다. 하루빨리 본래 위치인 조선요로 돌아 와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김용식씨는 "형님의 지나친 욕심이다. 숙부님(김정옥)이 할아버지 김교수 사기장에게 도자기술을 전수받아 쓰셨던 발 물레이니 당연히 숙부님께서 소유하시는 것이 맞다"고 증언했다.

 또 용식씨는 '김영식은 가족사랑과 친족간의 평화를 중시 여겨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모함속에서도 꿋꿋이 친족간의 평화를 위해 인내하며 살아왔다'는 기사내용에 대해서도 "너무 화가 난다. 사실 집안 이야기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신 이후 형님(김영식)이 모든 재산을 가져가 나머지 누이, 형제(김영식 외 6남매)들과는 담을 쌓고 산다. 제사며 명절때도 혹 재산 얘기가 나올까 아무도 방문을 못하게 한다"며 "막내동생 김윤식도 문경에서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금전문제로 형님(김영식)과는 왕래를 안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조선요 박물관에 김천만 선생의 작품으로 소개된 도자기들은 김정옥 사기장이 영남요를 개요하기 전인 70년대 관음리 작업장에서 만든 것과 문경으로 나온 후 관음리 작업장을 오가며 작업했을 당시 만든 작품으로 김용식씨도 이를 증언해 줬다.

 한편 주간신문인 A일보가 보도한 문경시 소재 3대 도예가 노병수 선생의 '발물레는 조선요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해서 광산요 노병수 선생에게 확인한 결과 "나는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다. 백산 김정옥 선생댁과는 사돈지간이고 김영식도 잘 알아 집안이 화목해 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지 하지도 않은 말을 마치 내가 한 말인 것처럼 적어놓았다"며 "기사가 이렇게 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정색을 표했다.

 또 김정옥 선생의 자녀 김남희(백산헤리티지연구소 소장)씨는 A일보 기자와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전통 발 물레는 아버님이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김교수 사기장)로부터 물려받아 힘겹게 도예기술을 수련한 도구"라는 것을 토로했으며 "큰 아버지(김천만 선생)는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으셔서 발물레를 사용하신 적도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내용의 기사를 쓴 것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김남희 소장은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관음리 가마의 작업장에 있어야 할 발물레는 막내로 어린나이에 가업을 이어왔지만 선친께서 작고하고 대부분의 농토를 물려받은 큰 형님과 달리 생계가 막막해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도자기를 만드는 재주가 없으셨던 맏형님, 즉 조선요 선친의 필요에 의해 막내인 아버님이 관음리 작업장에서도 도자기를 만들어 드리기 위해 새로 만든 바로 그 발물레다"고 밝혔다.

 본지 기자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국가무형문화재 제 105호 사기장과 두 분의 도 무형문화재를 배출한 국내 유일 조선 백자 9대 가문과 집안에 대해 취재하며 깊은 아쉬움과 책임감을 느꼈다.

 언론사들의 무분별한 취재와 잘못된 기사 내용들로 인해 당사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피해에 대해 같은 언론인으로서 좀 더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가 이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훌륭한 가문의 재원들이 서로 함께 힘을 모아 미래를 준비 한다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빛낼 가문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란 큰 아쉬움을 뒤로 하며 이번 취재를 마무리 했다.

 권정민 기자jungmini001@naver.com

경상투데이 기자  lsh9700@naver.com
- Copyrights ⓒ경상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포항, 태풍 '미탁' 파손 시설 방치..
구미시설공단 이사장, 돌연 사퇴에 ..
경주 강변로 개설현장에 '불량 사토..
가을 밤 특별하게… 시월愛 마지막..
'영주 거점소독시설 특혜의혹' 사실..
황당한 원남새마을금고 이사장 여론..
■ 가짜뉴스로 주인 뒤바뀔 뻔한 '3..
경주 서면 우량농지 조성지 '논란의..
예천 "공감·존중으로 민원인 응대..
울진, 어르신들 인권 재정립 '최선'
최신뉴스
박명재 '한국당 국정감사 우수의원..  
도의회 교육위원회, 행정사무감사 ..  
"대한체육 새로운 100년의 출발, ..  
도 농수산위 행감, 도정 생산성 제..  
경북 축단협 "철저한 방역으로 안..  
경북도, 어르신들과 '배움의 기쁨'..  
안테나숍, 환동해 중심 포항에서 ..  
안동 '미세먼지 회피 휴게쉼터' 눈..  
영천, 관외거주 체납자에도 '강력 ..  
지역인재 양성… 경북발전 견인 '..  
대구 '칼국수 한그릇에 언 몸 사르..  
영주, 인플루엔자 유행주의보…'조..  
울진 '얌체 주차, 이젠 그만' 장애..  
뜨는 '수소경제' 뛰는'대구·가스..  
쫄깃 달콤 '청도감말랭이' 열차여..  

회사소개 윤리강령 편집규약 조직 및 연락처 구독신청 광고문의 제휴문의 개인정보취급방침 기사제보 고충처리 청소년보호정책
상호: 경상투데이 / 사업자등록번호: 505-81-77468/ 주소: 경주시 양정로235(동천동) 덕양빌딩 8층 / 등록일 : 2013년 12월 30일 / 발행인.편집인: 이승협
mail: gst3000@naver.com / Tel: 054-748-0070 / Fax : 054-748-3663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아00287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은솔(편집부장)
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