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미술의 흐름은 다양성을 넘어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전통은 현대를 이어가고, 현대는 전통을 근간으로 재창조의 카테고리를 가른다. 우리 것의 소중함은 세계 속에 한국을 빛내는 대안이다. 한국의 깃발은 우리에게 친숙한 생활 문화였다. 21C 즈음해 깃발은 현대미술을 만나 시민들과 친숙한 소통을 이뤄내고 있다.
깃발과 현대미술이 어우러진 `광한루원 바람의 詩` 전시가 오는 12일부터 2024년 1월 11일까지 전북도 남원시 광한루원 내 일원서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 미술의 현재와 메타 시기를 부각하는 예술장르를 조명하며 인간-자연-공간 간 소통의 장으로 마련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깃발과 미술의 산증인이자 설치미술가, 기획자인 김해곤 대표의 글을 통해 21C 깃발과 현대미술의 전개를 더듬이 본다.
■ 한국 깃발의 역사와 기능
한국 깃발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추정은 원시주거지에서 발견된 목편에 적, 황, 녹 등 채색이 된 유구가 발견된 사실을 기초로 한다.
또한 삼국시대에도 구체적인 물증이나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이미 마, 견, 모, 면 등 모든 직물이 제직된 점과 고구려 초기의 고분인 안악(安嶽) 3호 분(고구려 357년, 고국원왕 27년)의 벽화 행렬도에서 깃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점으로 보아 깃발이 사용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국 깃발의 문헌적 기록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여복지(與服志)와 `고려도경`,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를 보면 의장에 대한 규정이 정해지고 여러 의장기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문헌에는 제도화된 기의 종류 및 사용법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의 기치를 이어받으면서도 중복되고 복잡한 것을 간결하게 정비하는 대신에 용도가 세분됐다.
조선시대의 기치를 의장기와 군기로 나눠보면 의장기는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 등의 경우에 따라 구별되고 왕의 거동(擧動)에 있어서도 대가, 법가, 소가 등에 따라 차이가 있다. 군기는 글자 그대로 군대에서 쓰이는 깃발이다.
조선시대 이후 한국의 깃발은 일제강점기 전까지 군기와 의장기 그리고 농기 등으로 구분돼 사용돼 왔다.
전장에서는 군사력과 군의 사기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늘 기수가 앞장을 섰으며 의전에서도 늘 앞에는 깃발이 섰다. 또한 영토 구분과 권력의 징표로 내세우던 것이 바로 깃발이었다.
불교에서는 만장 등의 깃발로써 내세와 극락의 연결점이 됐고 무속신앙에서는 깃발이 신(神)의 영역을 표시하는 중요한 도구였으며 신력(神力)의 간접 표현이기도 하다.
즉 깃발(旗)은 상제(上帝)나 천지신명(天地神明)의 권위를 빌려 제왕 등 특정인이나 국가 또는 집단의 지위와 권세를 온 천하에 나타낸 표상이었으며 종교의식에 있어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구실을 했다.
이 외에도 신호와 장식적 요소 그리고 축제와 행렬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깃발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는 상징성이다. 기는 정복을 상징하고 신호로 쓰이기도 한다.
전쟁에서 백기는 평화 또는 항복을 뜻하고 철도에서 푸른 기를 흔들면 기차가 진행하고 붉은 기를 흔들면 정지한다. 적십자기는 의료기관을 상징하므로 전쟁에서도 그 표지가 있는 곳은 공격하지 않는다. 또 어선에는 만선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풍어기를 달고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는 만국기를 달아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렇듯 깃발은 언제나 공공의 장소에서 표식과 함께 상징적 존재로 사용돼 왔다.
다양한 문양과 디자인이 새겨진 깃발에는 커다란 의미와 역사성이 내포돼 왔고 깃발은 항상 공공의 장소에서 권력의 상징물로 사용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그런 깃발은 모두 자취를 감췄으며 한국전쟁 이후 상점의 간판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그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에는 학교, 군대, 공공기관, 기업, 사회단체 등에서 자사를 상징할 수 있는 깃발을 제작해 널리 사용하고 있다.
■ 예술 매체로의 깃발
이러한 깃발이 현대에 들어서 예술적 매체로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사가 그다지 깊지 않다. 현대미술의 태동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깃발과 바람을 사용한 미술작품으로는 지난 1969년 이승택의 야외 설치작품 `바람`이 우선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깃발은 1980년대 우리 미술사에서도 그 명맥을 볼 수 있는데 과도기의 80년대, 민중미술이나 대학가에서 `선전성의 회복과 시각매체운동`을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민중운동의 걸개그림 형식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 깃발은 민중미술의 양상과는 다르게 순수한 미술적 의미와 새로운 미술표현의 매체로 접근한다.
당시 21세기 청년작가회(회장 김해곤) 작가들이 모여 미술의 대중화 운동과 건조한 공공의 장소를 문화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방편으로 캔버스에서 나무틀을 제거하고 야외에서 전시하는 것에서 처음 착안했다.
우리나라에서 깃발이 공공미술형식으로 촉발된 것은 지난 1998년 21세기 청년작가회가 기획한 `한강 깃발미술전`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일반대중에게 다가가는 미술이 주된 관심사였으며 시민들과의 소통(communication) 시도와 공감대를 찾아가는 것에 목적을 뒀다.
닫혀있는 미술관을 벗어나 열린 공간으로 나가 소수 특권층이 아닌 불특정 다수인과 호흡을 시도하고자 다양한 실험적 예술을 시도한 것이다.
■ 대중과의 소통과 커뮤니티
이와 같은 깃발 설치는 일반대중이 미술관을 찾아와 작품을 감상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작가가 대중이 있는 공간 속으로 작품을 들고 찾아감으로써 그들과의 소통(communication)을 시도하고 그 속에서 공감대를 찾아내고자 한 것이다.
일반대중에게 미술을 많이 보여주고 의사소통을 시도하며 그 속에서 많은 교감과 교류를 시도함으로 미술작품은 더 이상 예술가와 관람자의 매개체 관계가 아닌 그저 편안한 하나의 자연적 대상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또 단순히 깃발에 미술적 표현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깃발을 통한 조형성의 탐구`와 `환경과의 친화성`이라는 근본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깃발은 공공의 장소에서 예술 깃발로 새롭게 탄생하며 예술의 중요한 매체가 되는 것이다.
■ 광장문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상징·표식에서 예술의 언어로 확장되며 공공성을 띤 시각적 기호가 된다.
다양한 색상과 패턴의 반복은 강렬한 메시지와 함께 군집을 이루며 중앙정부·지자체·기업의 목적에 의해 공공장소에 설치된다.
공공장소의 깃발 설치는 닫혀 있는 공간보다는 열린 공간을 지향하고 예술작품으로서의 특성과 특정 장소에서의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깃발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면 효용이 없는 그야말로 철저히 사회성과 공공성을 갖는 매체이다.
깃발은 마당 미술의 새로운 아이콘이며 깃발 미술은 대중이 활동 공간으로 곧장 파고든다.
그래서 대중들이 도시를 지나거나 공원을 산책하면서도 멋진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일상이 축제가 되고 하루하루를 삶의 축제로 맞이할 수 있도록 대중을 위로하고 활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바로 깃발 미술의 가치이다. 그것은 축제 미술이며 마당미술, 광장미술, 개방미술의 형식을 띤 고급문화를 지향한 것이다.
제스퍼 존스의 `성조기`와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삼색기`가 캔버스에 응고된, 박제되고 포장된 박물관용 깃발이라면 `2002한일월드컵공식문화행사-2002 FLAG ART FESTIVAL` 깃발들은 살아 숨 쉬듯 대중을 향해 손짓하는 생생한 미술이다.
그리고 깃발은 초국가적, 초인종적, 초문명적인, 포스트모던 시대의 마지막 아날로그식 통신 매체라고 하고 있으며 하이데거의 `고향`(die Heimat), 롤랑바르트의 `찌름: 풍크틈`(punctum)의 의미처럼 깃발을 잃어버린 문명의 시원(始原)에 대한 향수를 지니는 것이라 하고 있다.
김해곤(설치미술가 / 미술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