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를 넘어 조선시대에서도 풍수에 대한 집착은 유독 심했다.    벌 중에 가장 모욕적인 벌이 부관참시라 하지 않나.  중국 동진 곽박이 쓴 장서에 `죽은 사람은 생기에 의지해야 하고 그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져버리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쓰였으며 여기서 나온 풍수가 정설이다.  산 사람은 땅위에서 생기를 얻고, 죽은자는 땅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고, 산 사람보다는 죽은 자가 얻는 생기가 많으니 죽은자가 얻는 생기는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고 여겼는데 이것을 동기감응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상의 묘를 잘 모시면 후세들이 부귀영달을 꾀할려고 하는 일종의 비과학적 사실이다.    그래서 풍수지리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지나쳐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자 정약용과 박제가는 풍수의 폐단을 지적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미신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에 의거 화장제도를 신설하고 이장은 공동묘지에서만 인정했으나 오히려 하류층들은 공동묘지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사유림을 확보해 가족묘지를 설치하고 명당에 매장하려는 것이 늘어났다.    해방 이후 일제관헌 강제 법제 인식의 반발로 매장문화는 더욱 성행 했다. 근대에 와서는 묘지 및 시설물의 크기를 제한하는 등 법률로 규제를 했지만 여전히 국민 계층간에 묘지조성은 재산과 비례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 기업가들의 풍수는 더욱 심해졌다고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풍수는 우리 민족의 대대로 내려온 민간 신앙처럼 신봉하고 있다. 자식들이 단명하고 원인 모를 병에 걸리거나 사업실패와 당선을 위해서 `파묘`를 선택한다. 수 천년 내려온 대한민국 땅에 명당은 겹겹이 시신에 쌓여져 있을 것이다.    김영삼 정권 때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일제 강점기에 국토 정맥마다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시켰다고 그것을 뽑기 위한 운동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쇠말뚝을 뽑고 다닌 민간단체에서 북한산 백운대 일대에서 뽑은 쇠말둑 15개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심지어 `소말뚝 제거해 민족혼을 되찾자`라고 신문에 대서 특필됐다.    그런데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백운대에 관광객을 위한 쇠줄을 놓기 위한 말뚝이었다. 울산 대왕암에 나무뜸 혈침이 꽂혀있다고 했는데 살펴보니 목재 전신주였다. 심지어 동해시는 쇠말뚝 한 개에 30만원 포상금을 건 적도 있었다. 이것을 앞장 선 사람 또한 풍수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영화 `파묘`에서도 마찬가지다.  악지에 친일파를 묻고 그 밑에 일본 사무라이 중 가장 잔악한 장수의 관을 바로 세워 심었다는 설정이다.  자신들 후손이 단명을 피하기 위해 파묘를 하니 자손들은 살아 났고 밑에 세워져 있는 일본 사무라이를 죽이니 우리나라는 평온해 졌다는 영화이다.    악지에 묘를 쓰면 자손이 망하고 쇠말뚝을 없애야 나라가 부흥한다는 전형적인 풍수 영화이다. 풍수가 독립운동을 한 셈이다. 미신으로 나라를 구했다.    영화 `파묘`가 흥행을 하고 있다.  세상사 살기가 힘들어졌다. 저출생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조상 묘를 `파묘`하고 전국에 있는 쇠말뚝을 뽑아야 할 때인가보다. 신기 있는 무당이 춤춰야 할 때이다.    그런데 유독히 미신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영화 `파묘`에 몰입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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