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국경을 넘어 인간과 인간의 교류를 통해 움직인다.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는 그 움직임은 불과 같이 자연스럽게 빠른 속도로 전파되지만 15세기 조선 초기 일본의 무로마치 무렵만 하더라도 하나의 문화가 전파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날에도 일본은 차로 외교를 펼쳐 다도로 나라를 알렸고 초암다실의 건축미를 세계에서 인정받으며 차와 다실의 영원성을 세계에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 차인과 경주 시민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동양삼국 차에서의 삶을 통달하는 초암차를 탄생시킨 차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은 32세에 경주 용장사에 들어와 기거한 시대의 탁월한 문학인이자 사상가인 매월당 김시습이다.
1463년 매월당 김시습은 신라 고도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 용장사의 초암에서 초암차(韓茶)를 창시했다. 매월당은 조선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고 유·불·선 사상을 통해 소박한 초암 형태의 다실에서 차를 통한 선차의 특수성을 이뤄 내어 우주의 섬리를 평화롭게 바라보는 정신을 음차의식으로 만들었다.
김시습은 차가 벗이었고 스승이었고 수행의 반려자로 깨달음과 수생으로 마음을 달래며 삶의 초월과 물아불이의 사상을 실천했다.
일본 국왕의 시설인 교토 덴류지(天龍寺)의 서당(부주지) 월종준초가 세조를 알현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산 용장사 초암을 방문해 매월당으로부터 초암차 정신을 전수받았다. 이는 매월당 김시습의 70여편이 넘는 다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월종준초는 일본에 귀국해 당시 교토의 유명한 사찰인 다이도쿠지 최고의 선승 잇큐 화상에게 매월당의 초암차 세계를 전했다. 잇큐-무라다슈코-센노리큐 순서로 전승돼 가면서 매월당의 초암차 정신은 점차 그들의 다도로 형성이 됐다. 초암차와 함께 초암다실은 일본에 전파돼 일본 건축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후에 센노리큐의 와비차의 선승이 된다.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는 조선후기 정약용과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에 조명이 맞춰져 330년이나 앞에 일본의 다도를 형성시킨 초암차는 묻히고 말았다.
일각의 차인들은 매월당 김시습의 초암차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애써 간과하고 있다. 근현대부 지방의 소박한 초암 형태의 좁은 공간에서 한 잔의 차를 통해 세상을 관조하는 정신의 초암다실은 일본 건축 구조미로 극찬을 받으며 국보가 됐다. 초막의 작은 집이 15세기에는 애초에 일본 건축양식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독특한 한류 건축양식이다.
해마다 제자들과 용장골을 올라간다. 아름다운 오솔길을 올라가다 보면 애석하고 애석한 것은 김시습의 법명으로 지어진 설장교만 덩그러니 충렁다리로 서 있다. 어느 한 곳에도 그가 차를 했던 흔적도 없고 그의 70여편이 넘는 시 한 편 적혀 있지 않다.
기암괴석 너럭바위에 앉아 자연의 풍류를 노래하고 삶의 고뇌를 차로 벗하며 당나라 육유 다경을 거울삼아 차를 기르고 만들었던 매월당 차인의 모습은 없다. 여기 즈음이 차밭이었을까? 이 바위에 앉아 차를 마셨을까? 저 넓은 경주평야를 내다보며 이곳에서 일본에서 온 사신과 풍류를 나눴을까? 곳곳에 숨은 자리를 보며 사색에 젖게 된다.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차설에 오는 사람들에게 애가 타도록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차 한 잔에 듣고 마셔 버린다.
가끔 일본인들이 차를 마시러 온다. 말차 한 잔 곱게 내어 드리며 우리가 지키지 못한 초암차를 일본이 지켜줘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일본인은 다시 놀라워한다. 이렇게 말해 주는 한국 사람은 처음 본단다.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초암차에 대한 논문도 쓰고 있고 책을 내기도 하지만 그렇게 묻어 두고 있다.
작은 힘이라도 내 지키고 보전하려는 움직임은 적다. 이유는 간단하다. 6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우리나라의 근 현대 차 문화가 조선 후기에 초점을 맞추고 알리고 공부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힘과 목소리에 펼쳐보지도 못하는 초암차가 돼버렸다.
필자는 22년 차를 배우는 제자들과 초암차보존회를 만들었다.
작게나마 기림사와 용장골을 오가며 매월당 김시습의 차에 관한 흔적을 찾고 이를 알리며 계승하려 노력하며 경주 신라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에 안타까운 마음만 보태고 있다.
일본 다도의 어머니 같은 땅 세계 10대 도시 경주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평화로움과 안식을 느끼는 도시에서 잠시 나마 역사기행을 할 수는 없을까? 차를 통한 문화기행 관광상품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치 있는 초암차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경주시의 묻어둔 역사를 찾는 하나의 바람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