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무기로 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기필코 다시 세우겠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며 `공정`과 `법치`의 상징으로 부상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1년 6월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했던 말이다. 그러나 3년 반이 흐른 지금 요새화된 한남동 관저에 머무는 그의 모습에서 상식과 자유, 민주주의, 법치, 공정의 가치는 찾아볼 수 없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불법에 칼을 빼 든 강골 검사.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국민적 지지를 얻어 정치 입문 8개월여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제 그의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돼 버렸다.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인 공정과 상식은 자취를 감추고 마치 자신이 법 위에 있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법치주의란 국가 공권력의 모든 작용과 행사가 사전에 정해진 명확한 규칙, 즉 법률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특히 법 앞에서 권력자가 예외가 돼선 안 된다는 게 핵심이다. 역사에서도 이 같은 노력은 계속돼 왔다.
1215년 잉글랜드의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를 통해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였다. 프랑스 철학자 샤를 드 몽테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에서 권력 남용을 막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법과 권력을 분리하고 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현재 모습은 마치 법에 구속받지 않는 옛 권위주의적 통치자를 연상케 한다. 성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외부의 적을 막던 중세 장수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지적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칼을 내려놓고 끝까지 책임을 졌다는 점이다. 비상계엄 사태로 군·경 지휘부 9명이 모두 재판에 넘겨졌지만 정작 계엄 최종 책임자는 윤 대통령은 여전히 관저에 머물며 경호처의 보호를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수사에 응하는 대신 변호인단을 내세워 여론전에 나섰다. 윤 대통령 측은 법원의 체포영장 발부에 불복하며 영장 자체가 불법이자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과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면서 이를 "무너진 법치주의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불법체포야말로 내란"이라는 주장까지 들고나왔다.
87년 체제 이후 구속되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대통령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남을 탓하거나 증오를 부추기진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특검 수사 앞에서 변명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금 이 시간 누굴 원망하기보다는 이 모든 것은 내 탓이라는 심정이고 자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반면 윤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애국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편지에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외쳤다. 그가 말하는 `애국시민`은 도대체 누구인가.
윤 대통령은 "나라 안팎의 주권 침탈 세력과 반국가 세력의 준동으로 대한민국이 위험하다"라고도 주장했다.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세력이 과연 야당인가, 아니면 돌연 계엄을 선포하고 모든 수사를 거부하고 있는 대통령 자신인가.
그가 내세웠던 공정과 상식, 그리고 법의 가치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돼야 한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대통령이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바로 그것이 `살아 있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법을 집행하겠다`던 검사 윤석열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제 그 메시지를 입증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본인이다. 윤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법의 심판대에 스스로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