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은 경상북도 고시 제172호(1982.8.21.)로 금오산(′70.6), 팔공산(′80.5), 문경새재(′81.6)에 이어 경북에서 네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북도는 우수한 자연생태와 문화자원을 보유한 도립공원 내 자연마을을 “탐방객이 찾아오고 싶은 마을”로 만들기 위해 청량산도립공원 내 두실마을(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소재)을 명품마을로 조성했다.  청량산 도립공원 명품마을 조성사업은 `청량산과 상생하는 마을, 두실마을` 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총사업비 5억원(도비 2억5000만원, 군비 2억5000만원)을 지원하여 마을 주민이 직접 사업계획을 세우고 시행하는 주민주도형 사업이다. 신규 건물 및 탐방로 개설사업은 지양하고 명품마을 종합계획 수립, 전통마을의 고유한 스토리 발굴 및 브랜드 개발, 주민교육 등의 소프트웨어 분야와 의료기 지원, 민박시설 정비, 마을 내 한티천 생태체험장, 마을 벽화, 돌담길?꽃길 조성, 지역 농산물 판매시설(파머스마켓) 제작 등의 하드웨어 분야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를 통해 공원구역 내 규제위주의 공원정책으로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던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마을과 공원을 가꾸는 등 마을공동체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마을 경관이 뚜렷하게 개선되어 공원 방문객의 만족도도 향상됨에 따라 지역농산물 판매량 증가로 이어져 주민 소득향상에도 크게 기했다.  명품마을 조성사업은 공원구역에 거주하는 지역 주민의 생활환경개선 및 복리증진을 위하여 시행하는 주민지원사업으로, 2010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명품마을 제1호로 전남 진도군 조도면에 관매도를 조성’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한려해상 내도와 덕유산 구산리, 다도해해상 상서리, 월악산 골뫼마을을 추가로 조성했다. 청량산은 행정구역상 경북 봉화군 명호면?재산면, 안동시 도산면?예안면에 걸쳐 있으며, 최고봉인 장인봉은 높이가 870.4m, 전체 둘레도 40㎞ 남직한 규모로 선학봉?탁필봉?축융봉 등 퇴적암류로 이루어진 12개의 봉우리들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소금강이라 불릴정도로 경치가 아름답다. 신재 주세붕 선생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 ‘우리나라의 5대 명산을 묻는다면 북은 묘향산, 서는 구월산, 동은 금강산, 가운데는 삼각산, 남은 지리산이다’ 라고 적으면서 ‘선경(仙境)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두실마을 주변지역의 관광명소로는 청량사를 비롯해 여러 문화재가 존재하고 있다.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며, 열두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둘러쳐져 있는 가운데 꽃술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멀리서 보면 자연과 매우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유리보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은 연화봉 기슭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축되어 있으며 현판은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피난온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유리보전은 동방유리광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란 뜻이다. 그 앞은 경관이 뛰어나 청량사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이며, 세뿔 송아지 무덤(三角牛塚)의 전설도 있다. 청량사와 좀 떨어진 금탐봉 아래의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의상이 창건했다는 외청량사인 응진전이 있고, 그 옆에 깊은 바위틈에서 스며나오는 석간수가 흘러 탐방객의 목을 축이기에 충분하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인’이라는 당호를 지을만큼 청량산을 좋아해서 어릴때부터 청량산을 드나들며 공부했고, 후학들을 모아 강론도 즐겨했다. 퇴계가 공부하던 곳에 후세의 사림의 합의로 조선 순조 32년(1832)에 ‘오산당(吾山當)’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현재 청량정사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1901년에 강당 10칸, 부속건물 6칸으로 중건했다.  청량정사에서 응진전으로 가는 길목에 김생굴로 오르는 길이 갈래 나 있다. 김생굴은 신라 명필 김생이 10년 동안 수도했다는 곳으로 김생과 봉녀(縫女, 베짜는 여인)의 전설이 어려 있다. 김생은 이곳에서 9년을 수도하고 자신이 서자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도 이 산에서 김쌈을 해왔다며 솜씨를 겨루자고 제의했다. 김생과 여인은 굴 안에서 불을 끄고 각자 글을 쓰고 베를 짰다. 얼마 뒤에 불을 켜보니 김생의 글씨는 들쭉날쭉한데 여인의 베는 고르기가 올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김생은 더욱 더 정진하라는 신령님의 계시임을 깨닫고 1년을 더 공부하여 10년을 태워 마침내 명필이 되었다고 한다. 이 굴은 깊지가 않지만 한 사람이 자리잡아 수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청량산은 군사적 요새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었고, 천연요새로서의 지형적 요건들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 앞으로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나가고 천인절벽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지세는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청량산의 산성은 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데 동문지가 있는 밀성대 아래에서 축융봉을 거쳐 구축된 ‘공민왕산성’과 다시 경일봉에서 선학봉을 잇는 일명 ‘오마대로(五馬大路)’로 불리는 ‘오마도산성’이 공민왕산성과 청량산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오마도산성은 산성의 기본적 특징인 방어기능 외에도 청량산성과 공민왕산성을 이어주는 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어 다른 지역의 산성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산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유람을 즐겨했고 산수를 좋아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산을 유람하는 ‘유산(遊山)’이 사대부들의 여가활동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유산을 학습과정의 하나로 보았으며, 유산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한편 학문적 시각을 넓히는 방법으로 활용됐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창작된 기행문학의 일종인 유산기(遊山記)는 약 560편이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다음으로 지리산과 청량산유산기를 꼽을 수 있으며, 그 뒤를 소백산?묘향산?가야산?북한산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상대적으로 산의 규모나 명성면에서 다른 산에 뒤지는 청량산이 유독 많다는 것은 조선 시대에 청량산을 여행한 사대부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청량산과 각별한 퇴계 이황과 혈연 및 학연?지연으로 연결된 이들이 많았고 겨울철에도 한달 이상 독서를 하고 산에 오르며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최근에는 여름철이 되면 청량산을 휘감아 도는 아나리강변의 레프팅을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오고 있다. 레프킹은 고무로 만든 보트를 타고 빠른 물살과 바위, 폭포 등의 온갖 장애를 극복해가며 즐기는 레져스포츠로 협동심을 기르며 모험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레포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레프팅의 유래는 원시시대에 뗏목을 물 위에 띄워 타고 다니며 수렵과 이동을 하던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현대로 오면서 스릴과 재미를 즐기려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큰 물결이 생기고 유속이 빠른 급류지역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것처럼 보이지만, 숙련된 훈련을 받은 조종사들이 안내하는 경우에는 경험이 없는 사람도 금방 익숙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기상청은 올 여름 유난히 더위가 심하고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고하고 있어, 특히 여름 휴가철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도립공원의 제1호 명품마을인 두실마을’이 있는 청량산도립공원에서 옛날 선현들이 즐기던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서 사색도 해보고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산성 등을 방문할 수 있는 특별한 휴가계획을 세워봄이 어떨까?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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