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안강전투지 6.25 최후의 방어선 북한군 제12사단은 동부전선의 공백지대를 통해 저항없이 남하해 1950년 8월 9일 기계를 점령한 후 안강, 포항을 위협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해 제2연대와 함께 기계에 투입하고 제17연대와 민부대, 그리고 신편부대인 제26연대와 함께 기계에 투입하고 제17연대와 민부대 그리고 신편부대인 제26부대를 배속했다. 아울러 의성에 집결한 수도사단을 안강으로 이동시켜 적을 저지하게 했다. 13일 제1군단의 명령에 따라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안강지구로 이동시켰다. 16일 제17연대가 기계남쪽 고지를 탈환한 후 기계로 전진하고, 제1연대가 안강서북고지인 165고지와 129고지 일대의 적에게 역습을 가했다. 퇴로차단의 위협을 느낀 적이 비학산 일대로 퇴각함으로 제1연대는 고지를 확보하였고 이어 18일 오후 기계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비학산 일대에서 적은 제766부대를 해체해 병력보충과 부대를 재편한 후 8월 26일 야간에 대구모 공격을 재개했다. 적은 새벽 무렵에 기계를 재점령했다. 전황보고를 받은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동부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잭슨 특수 임무부대를 편성하였고 수도사단과 잭슨 특수임무부대는 기계를 점열하기 위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수도사단이 기계 남쪽 고지에 제18·제17연대·제1연대순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잇는 가운데 9월 2일 적이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전차를 선두로 기계~안강도로를 따라 주공을 투입한 적은 일부 병력으로 제18연대를 우회 공격해 아군 방어선의 서측이 위태롭게 됐다. 결국 제1연대는 165고지와 129고지 일대에서 물러나 안강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수도사단은 안강을 상실하고 곤제봉 일대에서 사활을 걸고 적을 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25 기계·안강지구 학도의용군 전적비 이 전적비는 6.25 전쟁당시 어래산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학도병의 빛나는 공훈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2000년 건립한 현충시설물로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북 공산 집단이 한반도 적화통일을 목표로 남침을 강행하였다. 기습 침공에 한국군은 하루 아침에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를 거듭하여 불과 한 달 여 만에 대구, 영천, 포항을 잇는 전선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여기서 더 밀리면 부산까지 빼앗겨 한반도는 완전히 공산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우리 학도병은 지원·참전하여 어래산을 경계로 40여 일간의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고지의 주인이 열일곱 차례나 바뀌었으니 당시의 전황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기계천, 형산강물이 선혈로 물들었고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어야 했다. 피아의 주력이 여기에 집중되었고 더 이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아, 위대하도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홍안의 소년들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소년 학병들의 고귀한 희생이 아니었던들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만끽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단 말인가? 누구하나 위로하는 이 없이 구천을 떠도는 무명의 영령들이시어 유해는 수습하지 못하였어도 그 기개는 살아있으리라. 6.25 50주년을 맞이하여 이한동 국무총리께서 제자를 써주시고 이종달 참전학도병이 글을 짓고 부지를 기증하였으며 전통문화선양회의 협찬으로 여기 격전지에 돌을 세워 영혼을 위로하고 후세에 전하노니 오늘에 사는 한국인이여 내일을 살아갈 대한의 아들, 딸들이여 조국의 미래는 그대들의 몫이로다` 대한민국 학도의용군회 세우다. (전적비에 새겨진 전공기)■학도병 참전기- 이종달 학도병전우회 경주시지회지부장 `정보국 학도병으로 전투지 정보수집` 학도병 이종달씨(80.사진)는 학도병전우회 경주시지회지부장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6·25 기계·안강지구 학도의용군 전적비`를 청소하고 비를 닦으며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5월 말 창고 지붕을 수리하던 중 낙상해 병원에 입원중인 이종달 지부장을 만났다. 이 지부장은 "전쟁이 일어나고 한 달도 채 못 된 7월, 들려오는 소문이 흉흉하기만 했다. 전쟁이 터져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안강까지 오겠나?`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기우는 점점 현실이 돼 북쪽에서 많은 피란민이 내려 왔다" 며 말문을 열었다. 7월 22일, 전쟁이 터지고 28일째 되던 날 대통령 제7호 `비상시 향토방위령`이 공표됐다. `만14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향토방위의 의무`를 갖는다는 것, 안강읍 주민들도 향토방위령에 의해 자치적으로 경비대를 조직했고 인근 어래산으로 올라가 주야간으로 경비를 서기 시작했다. 안강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5세의 소년은 사격훈련만 며칠 받고 어래산 전투에 참전했다. 지역학생이라고 국군에게 길안내를 했고 전쟁 중에 인민군 포로가 됐다. 협박을 이기지 못해 적군의 길 안내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탈출한 후에는 아군으로부터 포로 취급을 받았다. 어린 학도병은 전쟁이 갖는 모순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다. "가구당 한사람씩 경비대원이 되어 어래산을 지켰는데 병중의 아버지를 대신해 임무를 맡았다. 안강에서 태어나 안강에서 자라 어래산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오르내리곤 했던 동네 야산이었다. 그 산을 넘어 인민군이 쳐들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적이 없었다. 어래산으로 올라가 밤새 경비를 서고 아침이 되면 등교를 하는 조마조마한 날들이 이어졌다"며 말을 이었다. 야간 경비를 서기 시작한지 10일쯤 지났을 때 안강지역에 `향토방위학도대`가 만들어졌다. `우리 안강은 우리가 지키자!`는 결의로 참여한 학생은 40여 명 이종달 학도병보다 4년 선배인 `강팔수`가 동창들과 함께 향토방위학도대를 이끌었다. 학도대에 가입한 이후부터 어래산에 올라가지 않고 안강읍에서 경비를 서게 됐다. 11일, 국군수도사단 제17연대가 안강읍에 도착했다. 향토방위학도대 학생들은 하얀 천에 `학도대`라고 쓴 띠를 머리에 두르고 읍내 곳곳에 배치돼 경계를 섰다. 안강읍에는 피란가기 어려운 노인들만 남았다. 학도대는 안강읍 빈집에서 밥을 해 먹고 잠을 자면서 일심동체가 돼 고향을 지켰다. 8월 12일, 수도사단 제17연대와 `해군육전대`(해병대)가 안강 동북쪽으로 침입하는 적을 격퇴시켰고 제25연대도 임시 투입됐다. 대구에서 급파된 제26연대가 추가로 구연봉일대에 방어진을 구축하게 됐다. 이로써 안강지구에는 제1연대, 제17연대, 제26연대, 해군육전대 1개 대대, 제25연대 잔여병력이 진지를 구축해 인민군과의 혈전을 앞두고 있었다. "20일, 제 1군단 사령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는 육군중위가 향토방위 학도대를 찾아와 이 지역 지리를 잘 아는 학생 두 명을 뽑아 달라고 해서 나와 주영달이 차출됐다. 제1군단 정보국 소속 학도병으로 길안내를 하며 정보국 육군 중위의 전방 지역 정보수집을 도왔다. 기계면에서 대패한 인민군 12사단은 비학산에서 재편성을 하느라 1주일동안 거의 움직임이 없다가 기계면에 있던 수도사단 제18연대의 방어선이 뚫리는 바람에 낙오병을 수습하고 다시 반격해 왔다"며 당시 치열했던 전시를 회상했다. 이종달 노병은 "어린 나이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많은 참전용사들이 병들어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 역시 15년 전에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제는 나이 들고 힘이 빠지고 전우들은 죽거나 요양병원에서 나머지 삶을 이어가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상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외롭지 않게 자주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희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