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끄트머리 울릉도 도로변에는 하얀 꽃들이 몽글몽글 피어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늘에서 누군가 팝콘을 뿌려놓은 듯 하얀 꽃 무더기가 도로쪽으로 넘어질 듯 고개 저으며 늘어져 있다. 서양 귀부인들의 하얀 우산을 닮은 울릉도 고유종 `섬바디` 꽃이다. 두 번째다 .이 길을 기록하고, 알리고자 마음먹고 걷는 두 번째 걸음이다. 수십 번 걸었다. 살며 걸어보는 길 중 가장 깊은 걸음으로 걸었다. 숨겨두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걷고 싶은 길이었다. 맘 속 깊은 곳 이기적인 욕심이 생긴다. 이 길 전체를 뚝 떼서 내 몸 옆에 두고 비 오는 날, 안개 낀 날, 눈 오는 날, 햇살이 피부를 뚫을 정도의 강렬한 날 걷고 싶었다. 오래전 맨발로 걸었다. 무릎으로 걷는 아들을 품에 안고 걸었고, 두 발로 걷는 아들과 맨발로 걸었던 길이다. 황홀한 맨발 걸음이었다. 맨발에 닿는 건 생명이다. 흙은 살아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생명이 존재한다. 무기력하게 바람에 날리고 물에 씻겨가지만, 흙은 살아서 움직인다. 그 생명을 어떠한 매개체도 없이 온몸으로 받아들여 채울 수 있다. 싸그락 싸그락 밟히는 모래흙, 빠득빠득 밟히는 고운 흙, 푸득푸득 밟히는 솔가리로 가득 채워진 길, 이 고운 길을 어찌 맨발로 걸어보지 않을 수 있을까? 울릉도 나리분지에서 신령수로 향하는 길은 하늘에서 누군가 산책 즐기던 천상의 길을 내려주신 듯 고운 길이다. 동서로 1.5㎞ 남북으로 2㎞ 정도 되는 나리분지는 교과서와 수많은 책 속에 있다. 꽉 찬 버스에서 한무리 여행객들이 내려, 바다 한가운데 섬에 이런 평지가 있나 싶어 탄성을 지른다. 다른 이들은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며 지리 수업 시간을 추억하기도 한다. 나리분지는 분화구다. 신생대 거대한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이 흘러 나왔다. 분화구 주변이 깨지고 무너져 구덩이가 생겼다. 이 구덩이를 `칼데라`라 한다. 울릉도 칼데라를ㅤ`나리`라 부른다. 분화구에 물이 채워지면 `칼데라 호(湖)`라 한다. 나리분지에도 약 2만 년 전까지는 물이 고여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물이 없다. 나리분지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화구 마을이다. 그 뜨거운 용암이 흘러넘치던 분화구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개척 당시 500여 명이 거주한 적 있는 울릉도 제1의 집단부락이었다. 그들이 살면서 섬말나리 뿌리를 캐 먹고 연명하였다 하여 `나리 골`이라 불렀다 한다. 나리분지는 빈틈없이 산으로 둘러 싸여있다. 미륵산, 형제봉, 나리령, 말잔등, 간두산, 성인봉 들이 품고 있다. 이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를 `분지`라 부른다. 분지는 두 군데다. 나리분지(해발 500m)가 형 분화구고 알봉분지(해발 538m)는 동생 분화구다. 나리분지에서 신령수까지 왕복 약 4km, 산책하듯 걸으면 넉넉하게 두어 시간 걸리는 숲길이다. 이 길을 지나면 성인봉에 다다를 수 있다. 접근하기 어렵고 멀어서 쉽게 이 길을 걸어 보라 권하지 못한다. 대부분 여행객은 여객선이 닿는 도동이나 저동에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을 걷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한 시간여 그곳에서 반대편으로 달려와야 한다. 걷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아니면 도동쪽에서 성인봉을 넘어 이 길을 거쳐 가거나, 이 길을 지나 성인봉을 넘어 돌아가야 한다. 먼 길이다. 어렵고 힘든 길이다. 이 길을 걸어보면 울릉도(鬱陵島)를 왜 `울창한 구릉`이라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잰걸음으로 걷지 말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천천히 발과 발 사이를 좁혀 걸어야 한다.태초의 울릉도를 밟아 보는 것이다. 나리분지는 분화구다. 그 분화구 옆을 지나 들어가면 또 다른 분화구가 있다. 그곳을 관통한다. 출발이다. 나리분지 한편에 군부대가 있다. 철조망을 따라 옆으로 들어가면 시작이다. 5 분여 시멘트 길을 걷는 동안 거대한 나무 숲이 텐트처럼 둥글게 하늘을 가리고 있다. 웅장하다. 속으로 들어가면 마른 피부에 미세한 물방울이 닿으면 모든 신경이 꿈틀대듯 감각이 일어선다.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터널을 막 지났다. 어느 쪽을 보아도 나무숲은 깊다. 나무 아래를 가득 메운 초록들, 둥굴레를 닮은 윤판나물아재비, 명이나물 잎을 닮은 큰두루미꽃이 지천으로 나무 아래를 촘촘히 메우고 있다. 깊이를 가늠하지 못할 만큼 깊은 나무 숲이다.ㅤ 나무 숲 사이, 길은 흐느적거린다. 구불렁 구불렁 재미있다. 직선인가 싶다가도 모퉁이에서 사람이 쏟아져 나온다. 없던 사람들이 뒤를 이어온다. 성인봉을 내려와 끝이 보이는 산행길의 기쁨을 누리려 먼지 바람 일으키며 나리분지로 무리 지어 간다.ㅤ 잠시 어디선가 묘한 향기가 난다. 분간하기 힘든 냄새가 호기심을 흩트려 놓는다. 저만치 쉼터가 보인다. 향기의 근원은 그곳이다. 섬백리향 군락지다. 울릉 백리향이라고도 불리며 보라색 꽃이 핀다. 그 향기가 백리를 간다 하여 예전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가을이면 울릉국화도 볼 수 있다. 주변에 마련된 쉼터에서 한 무리의 여행객들은 서로의 머릿속 식물도감을 꺼내 말 없는 식물들을 향해 이름 부른다. 쉼터 의자에 앉아 몸을 움직이던 한사람이 크게 목소리 높인다. "저 나무 밑에 자리 깔고 한숨 늘어지게 누웠다 갔으면 여한이 없겠다" 한다. "여기가 천국이다, 가기 싫다"고 한다. 웃음으로 그들의 대화에 답하고 길을 재촉한다. 모퉁이를 돌면 넓은 터 안에 또 다른 넓은 평원이 보인다. 알봉분지다. 옛사람들이 배 만들 나무를 구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이 봉우리를 보고 새의 알을 닮아 `알봉`이라 불렀다 한다. 알봉분지에 들어서면 마치 아직도 사람이 사는 듯 예전 모습을 가진 집이 보인다. 책에서 보던 투막집이다. 독특한 집 구조로 되어 있다. 1880년대 울릉도 가옥구조를 간직하고 있고 1945년에 만들어진 집이다.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 그 틈을 진흙으로 메운 구조다. 지붕은 주변에 많은 참억새로 만들어 얹혀져 있다. 집 둘레 역시 억새로 우데기를 돌렸다. 지금은 국가지정문화재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돼 울릉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다시 나무 터널이다. 고운 모래흙 바닥을 10여 분 걸어 들어가면 목적지인 너도밤나무 숲 한복판에 자리 잡은 신령수 쉼터가 나온다. 가지런히 쌓아 둔 바위틈에서 쉼 없이 흐르는 신령수가 있다. 햇빛 한 줌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나뭇잎들은 공간을 메우고 있다. 이곳을 지나 치달으면 성인봉이다. 987m 성인봉을 쏟아지듯 내려와 이곳을 지나치면 나리분지다. 누군가 "울릉도에서 가장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있나?"라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이 길을 답한다. 수천 가지의 비밀과 수만 가지 모습을 간직한 길이 이곳이다. 안개 끼면 몽환적인 길, 비 오면 자연의 협주곡을 들을 수 있는 길, 햇빛이 따갑게 내리면 별천지 길, 눈 오면 포근한 길, 바람 불면 바람따라 흘러갈 수 있는 길이다.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다면 울릉도 태초의 뜨거운 용암 같은 숨결을 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숨결 내뱉지 말고 또 다른 길을 걸어보라 권하며 길은 한없이 이어진다. 임정은 기자 054791@naver.com